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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 난지미술창작스튜디오 비평워크숍]
신체성과 기호성의 사이(in-between) 상태
문혜진
지금까지 정아람의 작업과 결부되어 가장 많이 거론된 키워드는 집단과 개인, 젠더, 타자성, 공간/장소, 생존과 연대 등일 것이다. 오늘날 개인이 매일 마주치는 구체적인 시공간에서 “문화 생산자로서 개인이 지닌 가능성”(1)을 중시하는 작업의 지향 상 위의 어구들이 정아람 작업에서 중요한 개념이라는 점은 이의가 없다. 하지만 이 개념어들이 주로 작업의 내용적 측면과 관련된 것인 만큼 여기서는 작업의 형식과 관련해 정아람의 차별성이라 생각되는 지점을 간략히 논하고자 한다.
사진, 영상, 설치, 퍼포먼스 등 여러 매체를 자유롭게 활용하지만 정아람의 작업 전반에서 가장 중요하고도 근간이 되는 매체는 역시 퍼포먼스일 것이다. 유학 시절의 초창기부터 최근까지 정아람의 모든 작업은 퍼포먼스를 기반으로 한 매체적 변용에 다름 아니다. 개정된 심폐소생술의 방식을 사진 촬영을 통해 시연한 "Taking 100 Beats Per One Minute"(2009/2013), 작가, 퍼포머, 관객이라는 퍼포먼스 행위자들의 관계를 전치시킨 "더 이상 죽은 사람의 사진을 찍지 마세요"(2011), 행복 전문 강사의 퍼포먼스 영상을 발화의 텍스트와 교차시켜 행복의 이데올로기와 실체의 괴리를 묻는 "행복하십니까"(2014), 2016년 강남역 살인사건의 추모 포스트잇 메시지를 낭독하는 이주자의 퍼포먼스를 통해 타자와의 연대를 질문하는 "우연히 살아남은 내가, 당연히 살아남았어야 할 너에게"(2016/2018), 사적인 상황의 공공화를 문화예술계 노동자의 퍼포먼스 및 인터뷰로 풀어내는 "최저의 퍼포먼스"(2020) 등이 일례다. 심지어 외견상 가장 퍼포먼스와 거리가 먼 "Peer to Peer, Woman to Woman"(2017-18)도 구멍을 막는 관람자들의 참여와 공공화장실이라는 공간을 재전유하는 작가의 스캐닝을 통해 잠재적 협력의 연대 행위로 승화된다.
이 같은 일련의 작업들에서 눈에 띄는 것은 신체성과 기호(언어), 매개물로서의 매체가 결부되는 양상이다. 퍼포먼스의 본질은 퍼포머와 관객의 신체적 공동 현존에 기반하므로 신체성이 퍼포먼스 관련 작업에 개입되는 것은 당연하지만, 정아람의 경우 독특한 점은 일반적으로 신체성과 반대라고 간주되는 개념적이고 언어적인 측면이 신체성과 얽히고, 이러한 변증법적 교차를 사진이나 설치, 영상 같은 매체가 매개한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 초기 작업인 "Staying Alive"(2010/2013)에서 작업의 처음과 끝을 추동하는 것은 가장 기본적인 생존 신호인 심장박동이다. 자신의 무덤을 파는 작가의 퍼포먼스는 격렬한 육체노동 과정 중에 변화하는 심장박동으로 형상화된다. 작가의 심장 박동은 악보로 변환되어 드럼으로 연주되는데 악기 중 가장 원초적인 드럼의 비트는 이를 듣는 관객의 심장박동과 동기화되어 ‘살아있다(staying alive)’의 현존성을 육체적으로 공유하게 한다. 이때 심장박동이라는 신체성이 물성을 유지한 채 직접 몸 대 몸으로 부딪치는 것이 아니라 기호로 번역되어 개념화된다는 점이 중요하다. 육체의 징표는 전자 신호로 기록되면서 일차적으로 추상화되고, 악보로 변환되며 또 한 번 기호화된다. 관객은 이러한 이중 변환 과정을 모니터로 관찰하고, 그 또한 악보의 번역인 드럼 연주를 들으며 작가의 신체성을 간접적으로 추체험하게 된다. 여기서 관객의 신체적 감응에 개입되는 추상화와 추론은 기호의 부호화(coding)과 해독(decoding)이라는 의미 작용(signification)이 작가의 심장박동과 관객의 심장박동이라는 두 신체성을 잇는 가교로 작용함을 뜻한다. 이러한 일련의 번역 과정은 4채널 비디오로 가시화되며, 관객은 이들 채널과의 관계를 머리를 통해 이해하는 동시에 몸으로 공명한다. 이렇듯 신체성이 추상화된 기호를 거쳐 번역되는 특징은 정아람의 모든 작업에서 공통적으로 발견된다. "행복하십니까"에서 관객이 기묘한 이질감을 느끼게 만드는 것은 강연 퍼포먼스를 하는 퍼포머의 신체성과 텍스트의 괴리다. 얼핏 단순히 강연의 보조 스크립트로 보이던 텍스트는 동일한 내용이 행복과 안녕이라는 어구만 바뀌어 반복되면서 이미지와의 간극을 드러낸다. 내용이 바뀌었음에도 처음이나 두 번째나 완벽하게 동일한 강사의 표정 및 몸짓은 발화의 내용과 발화 행위를 분리시킨다. 다시 말해 퍼포머는 자신이 말하는 내용을 제대로 이해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발화 행위 자체에만 집중하고 있는 것이다. 행복 전도의 허망함은 텍스트와 신체성의 불일치에서 물화된다. "우연히 살아남은 내가, 당연히 살아남았어야 할 너에게"(2016/2018) 역시 구조가 비슷하다. 강남역 살인사건의 희생자를 애도하는 포스트잇 메시지는 이를 낭독하는 외국인 참여자의 어눌한 발음 때문에 투명하게 전달되지 않는다. 목소리의 신체성은 언어의 기의에 침투하여 발화자와 발화 내용의 간극을 상기시킨다. 최근작 "최저의 퍼포먼스"의 경우 언어와 신체성은 충돌하기보다 상호 의존의 형태를 띤다. 한 채널에서 참여자들이 몸을 부딪치며 신체의 언어로 소통하는 한편, 다른 채널에서는 구술언어를 통한 참여자들의 인터뷰가 이어진다. 소진의 경험을 토로하는 인터뷰이의 말은 언어의 지원이 아니었더라면 추상적으로 느껴졌을 퍼포먼스의 세부를 채우며 모종의 피드백 루프를 형성한다.
신체성을 있는 그대로 내세우지 않고 기호로 변환하여 모종의 거리감을 확보하는 것은 일차적으로 지나친 감정이입을 방지하고 성찰성을 주입하기 위해서일 것이다. 이런 지점은 개념적 성향이 강한 작가 특유의 방법론이기도 하겠지만, 즉물적인 신체성과 추상적인 개념/기호가 이분법적 대립을 벗어나 서로 경합하거나 협조하며 “이도 저도 아닌(betwixt and between)”(2) 상태를 형성하는 것은 그 자체로 흥미롭다. 행위자와 관객, 공공성과 친밀감, 시각과 접촉, 거리두기와 인접처럼, 대립항처럼 보이지만 퍼포먼스의 역사를 통해 실제로는 분리 불가능하며 역동적인 내부-작용(intra-action)임이 증명된 사건이 신체성과 기호 사이에서도 벌어지고 있기 때문이다. 그런 점에서 최근작 "최저의 퍼포먼스"는 신체성과 기호성뿐 아니라 여러 차원의 교섭 과정이 복합화되는 분기점으로 보인다. 커튼 뒤에서 상황을 관장하는 작가와 그의 의도를 실행하는 수행자라는 역할 구분은 여기서 훨씬 약화된다. 작가를 대변하는 카메라는 전체를 관망하는 것이 아니라 그저 또 다른 퍼포머로서 참여자와 동등한 눈높이로 현장의 일부만을 흘끗 보여준다. 퍼포먼스의 참여자 역시 관객과 퍼포머의 역할을 끊임없이 교환한다. 타자의 퍼포밍을 보고 있을 때는 관객이 되지만 자신이 눕거나 마킹을 할 때는 능동적인 퍼포머가 된다. 실상 이 공연에서 참여자들과 작가는 너나 할 것 없이 전체 퍼포먼스를 구성하는 개개의 행위자(agency)로서 독립적인 동시에 서로 영향을 주고 받는 네트워크의 공동 구성원이다. 여기에 전시장의 관객, 이를 매개하는 매체의 개입이 가미되면 피드백 루프의 항목들은 더 늘어나고, 이 관계들이 교차하며 새로운 가능성을 창출할 수 있는 여지도 많아질 것이다. 이 흥미로운 놀이/실험이 향후 어떻게 전개될 것인가. 자못 궁금하며 기대해봄 직하지 않을 수 없다.
(1) 정아람, 《나를 위한 말하기》전 아티스트 토크, 스페이스 윌링앤딜링, 2018.
(2) 빅터 터너(Victor Turner)의 용어. Victor Turner, The Ritual Process―Structure and Anti-Structure (London: Aldine Transaction, 1969). p. 95. (에리카 피셔-리히테, 『수행성의 미학』, 김정숙 옮김 (서울: 문학과 지성사, 2017), 142쪽 재인용)